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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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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다] 도시가 예술의 대상일까? 진해 원도심의 도시구조

도시가 예술의 대상일까? 보이는 질서와 함께 사는 예술 사이, 진해

글. 신 건 수 (경남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진해(현 창원시 진해구)는 한반도 남단 도시다. 벚꽃 군항제로 알려진 작은 도시, 그러나 원도심(현, 충무동. 이하 진해는 모두 충무동임)은 세계 유수의 양항(“시드니를 빼고는 세계 제일의 양항”, 『근대 문헌 속 진해』, 이하 동일), 상항 및 군항(“세계 제일의 군항, 상항”), 아름다운 도시(“다른 곳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일대도시”)를 꿈꾸었던 흔적을 지니고 있다. 오래전 일이다. 일제가 새로운 이름(웅천을 진해로 바꿈)을 부여하면서 군항이자 상업항으로 구상했으나 역사 격변으로 좌초됐다. 그래도 그 흔적은 남아, 당시 구상 한 아름다운 도시 구조를 지금도 보여준다. 완성되었으며, 파리나 시카고의 축소판이 될 수도 있었다. 


진해는 하늘에서 볼 때만 제대로 파악된다. 운전하고 가면 뭔가 복잡하고 불편한 곳이다. 예각 교차로가 많아 격자도시에 익숙한 우리에게 매우 낯설게 보일 수 있다. 중심에 있는 광장(중원광장)에서 8개의 도로가 팔방으로 뻗어나간다. 북쪽으로 진해역, 북서쪽으로 북원광장 그리고 남쪽으로 남원광장과 이어진다. 역과 광장을 직선으로 잇는 도시형태는 서구에서 도시미화와 연결된다. 파리는 루이 15세 때 시작된 미화 사업(Embellissement de Paris)을 오스만이 완성한 도시다. 진해는 이 파리,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20세기 초 시카고 계획과 공명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도시를 물리적으로 예쁘게 만든다고 좋은 도시일까? 디스토피아 영화 속 텅 빈 도시처럼, 인구가 빠져나간 도시나 잘 꾸몄지만 사람이 없는 도시를 좋은 도시라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사람의 생활 조직과 구성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 도시를 지배하는 시설이 있다. 도시는 지하와 건물 속에 숨은 상하수도, 전력/통신케이블 등 우리가 모르는 수많은 시설로 이뤄져 있다. 그래서 적어도 오늘날 한국에서 현대 도시는 철저한 계산 아래 지어진다. 효율성과 합리적 구조가 비용 절감과 관리 측면에서 유리하다. 도시는 미적 형태, 생활 조직, 설비, 효율성이 얽힌 복잡계이 며, 좋은 도시는 이를 모두 함께 고려한다.


복잡한 도시에서 예술적인 도시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는 곧 제목의 질문, 도시가 예술의 대상인가로 이어진다. 현재 도시를 만들게 된 과정을 조금은 되짚어 볼 때 대답이 가능하다. 단, 매우 단순화 해서 다룰 수밖에 없다는 점은 미리 언급한다. 도시 진화를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점은 현재 가장 널리 퍼진 격자형이 고대 동서양 모두(고대 로마, 동아시아 방리제 등)에 널리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 사회에서 온전히 계획된 공간은 주로 왕궁이 있는 도시의 주요 가로 및 관아 주변, 성당, 사찰 등으로 한정되었고, 나머지는 생활 방식에  맞춰 필요에 따라 조성되었다. 농촌공동체 마을이 다수이며 상업 도시도 좁고 구불거리는 길로 이뤄졌다. 이러한 모습은 전부는 아니지만(중세에 단순한 격자 도시도 발견된다) 널리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중세를 벗어나 도시가 시각적 형태를 지니기 시작한 변화는 15~6세기 피렌체와 로마다. 하늘의 질서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피렌체의 화가 보티첼리(S. Botticelli)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특히 이를 잘 보여주는데, 성스러운 장면이 당대 인물(화가 본인도 등장)에 에워싸여서 현실의 공간에서 발생했다. 이 시기에 신의 세계가 성당 밖으로 나와 도시로 확장된다. 메디치 공국의 행정 관청(uffizi)으로 지어진 우피치는 두 동 사이 길고 좁은 가로를 회랑으로 감싸, 가로를 성당 내부 같은 실내로 연출한다. 로마 식스투스 5세 교황은 앞선 교황의 방식을 따라 멀리 떨어진 성당들을 직선 순례길로 이어, 도시를 마치 성당 질서의 확장처럼 만들었다. 이는 바로크 도시의 특징을 앞서 보여준다. 약 160년 뒤의 놀리 지도(Nolli Map, 1748)는 성당 내부를 광장·가로와 같은 흰색으로 칠해, 성당과 광장, 직선 가로가 하나의 공공 공간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프랑스에서는 다른 상황이 발생했다.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던 태양왕(루이 14세)은 신적 질서 대신 자신의 질서를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 그리고 그 주변(현 베르사유 시)에 적용했다. 완벽하게 통제되는 공간이자 화려한 장식이 있는 곳이다. 각각의 행동은 에티켓(etiquette)이라는 이름으로 관리 되고 그에 걸맞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모든 것은 드러나야 했고, 왕의 시선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공간이며 동시에 왕을 향한 시선이기도 했다. 도시에서 오는 길은 세 갈래 가로(patte d'oie)로 베르사유 궁전 입구 중정에 수렴하고 궁 전에서 곧게 뻗은 주축 위 아폴론 분수에는 왕을 상징하는 아폴론이 전차를 타고 물에서 솟아오른다.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의 실 배치, 가구, 장식까지 모두 이 시선에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 통제된 공간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심지어 이 질서 잡힌 아름다운 세계는 마구간까지 아우른다. 필자는 이 마구 간에 만들어진 건축학교(ÉNSA Versailles)에서 잠시 공부하기도 했다. 


태양왕의 증손자이자 다음 왕인 루이 15세 때, 베르사유의 질서가 파리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유명한 볼테르의 소책자 『파리미화에 대하여(Des embellissement de Paris, 1749)』가 도시 미화 논의를 촉발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루이 15세 동상 설치를 위해 광장 부지 선정 공모(1748)와 광장 설계안 공모를 건축가 파트(P. Patte)가 한 도면(Partie du plan général de Paris, 1765)에 모아 두었다. 이 도면은 개별 광장을 넘어 파리 곳곳 주요 지점을 미화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처음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 세기 뒤에 오스만(G.-E. Haussmann)의 손으로 파리 전체를 대상으로 확대하여 실현되었다. 1860년대 즈음부터 방사형과 거대한 직선대로는 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진앙지가 되었다. 사람들이 몰려든 이곳에서 인상주의와 현대소설, 백화점과 기차역, 신문과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근대 대중문화의 산실이 되었다.

 

약 100년 차이를 둔 파트의 계획과 오스만의 실현은 눈에 보이는 형태적 유사성 이면에 극적 전환이 함축되어 있다. 그사이 프랑스 혁명으로 앙시앵레짐(구체제)이 끝나고 연속된 크고 작은 혁명으로 시민권은 강화되었으나, 왕의 도시 질서 조직 방식은 축소는커녕 더욱 확대되었다. 질서화 된 도시 구조가 사회 질서에 필수적인 장치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농촌 인구가 대거 몰려들 어 파리가 과밀해지면서 문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전염병의 관리, 즉 물론, 치안 및 교통 등의 다른 요인도)이었다. 파리 시민들은 콜레라(1832·1849), 결핵 등에 자주 노출되었고, 무차별적인 감염이 특징이기에 도시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다. 부분적인 도시 개선이 아닌 전면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전면 개조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를 떠안은 건축가는 당시 공중위생을 공간적으로 담당하는 의사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18세기 미화계획, 즉 흔히 바로크 도시계획이라 부르는 방식이 주요 광장과 이를 잇는 도로, 그 사이의 핵심 건물을 다뤘다면, 19세기 근대 도시계획은 도시 전체를 다뤘다. 이때 건축가는 두 영역으로 분리된다. 엔지니어 건축가와 예술적 건축가. 기술과 예술의 구분이 정확하게 건축에 나타났다. 도시 외과수술은 엔지니어의 역할이다. 도시는 병든 환자처럼 다뤄졌다. 도로는 혈관, 사람은 혈액, 공원은 허파다. 대동맥 같은 큰 직선도로(대로)가 필요했고, 그 주변에 공원이 곳곳에 있어야 사람들이 쉽게 흘러 다니며 공원을 거쳐 신선한 공기로 정화될 수 있다. 오염원을 제거하고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는 상하수도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심지어 오스만보다 한 세대 뒤 1883년 센 도지사 푸벨(E. Poubelle)은 건물마다 뚜껑 달 린 쓰레기통을 두도록 명령했고, 이후 프랑스어는 쓰레기통을 그의 이름을 따 poubelle라 부른다.

 

19세기 후반 전면 개조된 파리에서 근대 도시는 아름다움을 함께 갖추었다. 도시 전체가 직선 도로와 공원, 상하수도와 쓰레기통으로 무장한 도시에서 건물들은 고전주의를 비롯한 여러 역사주의 양식의 외피를 입었다. 건축은 파사드를 통해 조각이나 회화처럼 대중에 공개되는 도상적 작품으로 여겨졌다. 18세기에는 일부 기념건축만 예술적 파사드를 지녔지만, 19세기 말 도시에서 광장만큼 넓어진 대로에서 건축은 길에 따라 연속된 방식으로 미적 효과를 꾀 했다. 특히 파리가 그러한데, 연속된 건물에 발코니를 3층과 6층에 맞춰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 이면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던 시절 층마다 임대료가 달랐던 공간 구조가 있다. 직선으로 뻗은 도시에서 이런 장면은 멋지게 보였지만, 당시 사람들은 단조롭다고 여겼다. 대로의 주요 지점마다 화려한 기념건물을 세웠다. 대표적인 건물이 19세기 후반, 오스만의 파리에 황금장식을 지닌 가르니에 오페라다. 

 

그럼 당시 도시 조직(Urban Fabric)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파리는 방사조직으로 이뤄졌지만, 널리 도입된 것은 격자구조다. 격자형 가로체계는 고대사회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었다. 고대 그리스 밀레투스나 로마의 팀가드에서 나타나는 격자구조는 한반도 고대국가(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 등)에서도 방리제(혹은 조방제)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신라 왕경인 경주에 그 흔적이 남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격자형 도시 구조가 거의 사라졌다가 (유럽에서)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고대(그리스와 로마)를 이상으로 삼은 르네상스와 관련 있다. 격자 도시는 고대문화 부활과 함께 다시 주목받았고, 이를 참고해서 효율적 관리가 필요한 곳에 적용했다. 식민지 도시에 많이 건설되어, 스페인은 인디아스 법전(1573년)에 이를 구체화했다. 격자는 관리와 통제를 효율화하는 방식이고, 이 효율을 가장 철저히 추구한 것이 군대다. 18세기에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 는 군대 조직과 막사를 효율적으로 만들었으며, 도시에도 적용했다. 이후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시기 만들 어진 행정·군사 복합 신도시인 라로슈쉬르용(La Roche-sur-Yon, 1804)시와 로마 도시 팀가드를 비교하면 유사하다. 군대 주둔 도시와 식민지에 주로 격자 도시가 도입되었다.

 

이보다 앞선 1637년 철학자 데카르트(R. Descartes)는 『방법서설』에서 역사적으로 조성된 비뚤거리는 가로의 도시보다 한 엔지니어가 만든 평지에 질서정연하게 계획한 도시가 아름답다고 서술했다. 그래서 격자도시를 데카르트적 도시(Villes à la Descartes) 혹은 데카르트식 그리드(Cartesian grid)란 표현으로 부르기도 한다. 격자형이든 방사형이든 근대 도시의 질서정연함은 무질서가 한눈에 파악 가능한 구조 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철학자 푸코(M. Foucault)의 관점에서 도시의 질서는 건물 내부로 이어졌고, 그 안은 규율(discipline)로 채워졌다. 군대, 학교, 병원, 감옥 등에서 관리와 통제 속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도시는 대로에서 자유롭게 다니는 순환(circulation)이 이뤄지면서 통제 속 근대적 규율 공간 장치가 동시에 나타난다. 이 시스템은 19세기 중반 나타난 상하수도와 방역체계를 비롯하여 점차 복잡해지는 도시계획시설과 결합되어 현대도시는 마치 격자형태의 거대한 기계처럼 작동하고 있다. 

 

 

질서와 규율이 잡힌 도시에 아름다운 외관을 붙인 파리 같은 도시는 곧 여러 국가에서 적용되었다. 특히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미국에서 나타난 도시미화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이 대표적이다.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의 "화이트 시티(White City)"를 계기로 건 축가 대니얼 버넘(Daniel Burnham)이 주도했다. 산업화로 무질서해진 미국 도시에 파리의 오스만식 계획과 보자르 건축을 맞게 이식하려는 운동이었다. 효율적인 격자에 광장과 도로의 위계가 분명한 방사를 결합한 구조는 도시미화운동에 잘 맞았다. 
격자와 방사가 결합한 도시 구조에서 방사 축에 맞춰 도시 미적 경관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 있는 광장이 핵심이다. 도시적으로 보면, 방사형으로 뻗은 길에 시선을 모아 기념물 등으로 통경(Vista)을 연출한다. 

 

 

주로 대로의 끝 지점에 둔 기념물로 시선을 수렴하는 방식이다. 미국에서 대표적인 장면은 맥밀런 계획으로 만들어진 워싱턴DC 내셔널 몰의 축이다. 베르사유를 참조한 랑팡(P. L’Enfant)이 1791년 방사와 격자를 결합한 계획으로 뼈대를 잡은 후, 도시미화운동 시기 재정비된 것이다. 이 시기 방사-격자 구조는 도시미화운동과 함께 널리 확산했다. 1871년 화재 이후 무질서하게 재건되었던 시카고에 방사형 가로를 추가하는 종합계획(Plan of Chicago, 1909년)을 선택되었고, 바로 전에 미국의 식민도시인 필리핀의 마닐라(1905), 한 세대 후에 일본 관동군이 만든 만주국 수도 신경(현, 장춘시) 계획(1932) 등에도 적용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진해 방사-격자 계획(1910)을 만난다.

 

진해의 방사-격자 결합은 이 형식이 세계로 퍼지던 시기에 일본인의 손을 거쳐 들어왔지만, 그 방식은 독특하다. 대부분의 방사-격자 결합은 한쪽으로 편중된 방식으로 바르셀로나, 워싱턴 혹은 시카고 등이 격자에 치중되었다면, 대련이나 마닐라는 방사형에 격자를 맞췄다. 진해는 방사형과 격자형의 위계가 균등하다. 이런 경우는 드믄데,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 시 정도가 유사하다. 평지에 조성된 라플라타와 달리 진해는 제황산 등 산과 바다에 둘러싸인 경사지에 조성된 도시다. 따라서 진해는 많은 지형적 어려움에도 이를 극복하면서 평면 기하학적 형태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결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방사-격자 도시로서 진해의 독특함은 라플라타와 비교할 때 드러난다. 라플라타  바둑판에 사선을 정확하게 맞춘 것이 라면, 진해는 엄밀히 말하면 단순 바둑판 격자가 아닌 다층 격자 체계와 방사구조  결합했다. 핵심은 격자처럼 보이는 구 가 사실은 중원광장을 중심으로 사각  가로가 크게 파동처럼 외부로 확장해 여러 개가 만들어진 형태다. 그래서 방사  가로와 함께 보면 마치 사각형 거미줄 처럼 나타난다(세부 내용은 필자의 논문  참고하라, 『진해시가지의 가로체계와 토지구획의 관계에 관한 연구』). 이런 형 태로 보면 르네상스기 이상도시와 유사 다. 팔마노바(Palmanova)는 육각형 광장부터 시작하여 파동처럼 가로가 발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해 중심지도 이와 닮은 방식으로 짜여 있다. 거기에, 상징성과 미학적 의미를 더하고자, 중원 광장에 500년 이상 된 팽나무(1950년대 고사함)를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4개의 뾰족한 건물이 있어 도시의 위계와 질서  시각적으로 보여주었다. 참고로, 진해 남원광장 남쪽은 태평로를 따라 길게 만들어진 격자 체계다.

 

진해도 처음에는 여느 도시와 같은 단순한 방사-격자 도시로 구상되었다. 진해 시가지의 최종안이 나오기 전에 구상된 계획안들을 보면 격자에 두 개의 사선가로를 붙인 단순 방사 구조이거나, 방사형 길에 따라 서로 다른 격자구조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형에 따라 변형되거나 사선가로에 격자가 맞춰지는 등 동시대 다른 도시, 이웃한 마산(신마산)에서 보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완성된 진해는 서구식 도시 진화를 압축 적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도시다. 또한 가로의 크기는 도시의 규모에 비해 매우 커서 지금의 모습만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 도시가 만들어지던 시점인 1912년 ‘진해대시가발전예측도’를 보면, 현 충무동을 넘어 여좌동까지 계획한 미래 모습을 담고 있어 왜 가로가 그렇게 넓은지 그리고 이 글 초 반부에 설명한 진해에 대한 글이 나온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진해는 당시 서구 기준으로 예술적 도시로 계획된 것이다. 

 

진해를 주변 다른 도시와 비교해보자. 재밌게도 진해와 함께 통합창원시를 구성하는 옛 마산과 옛 창원은 한국 도시의 각각 다른 의미로 전형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마산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조창이 있던 원마 산과 1899년 개항장이 들어선 근대계획도시 신마산에 각각 다른 도심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신마산의 서구식 근대도시계획을 확대하여 원마산까지 이어지도록 했다. 그래서 신마산은 체계적이지만 구릉지에 맞춘 격자 구조가 있다면, 원마산은 조선시대 좁은 가로길과 일제가 넓고 직선으로 만든 대로가 동시에 존재 한다. 거기에 매립지의 평평하고 정확한 격자구조가 이 도시 한 곳에 결합해 산과 바다 사이 선형으로 길게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마산이 수출자 유지역으로 산업화가 되던 시기 구릉지 더 위쪽 등 도시 밖으로 난개발이 있었 고, 최종적으로 더 위쪽에 산복도로(무학로)를 만들면서 현재 모습이 된다

 

 

옛 마산의 도시화는 서울이나 부산 대도시가 겪었던 도시 현상의 축소판이다. 계획된 지역과 무계획 지역의 혼성이다. 난개발 지대에 상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가 목욕탕 문화다. 일제가 처음 도시를 개발한 지역에 1910년대 첫 일본 목욕탕(앵탕, 현 앵화탕)이 등장하고 산업화가 고조된 시점에 집 안 목욕 시설이 열악해 목욕탕이 어느새 50 곳을 훌쩍 넘었다 더 시간이 지난 지금 난개발 지역 집들이 빈집으로 남아 황량한 모습이다. 과거에 근대도시 체계를 갖추는 게 우선순위였고, 지금도 미완성 상태인데 사람은 사라지고 있다. 

 

옛 창원은 마산의 난개발 문제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 기계공업(방위산업 포함) 육성을 위해 세운 계획도시다. 창원대로 를 축으로 남쪽 산업 지대와 북쪽 주거지역을 구분하고 남북을 가로지르는 중앙 대로를 따라 상업과 업무, 문화·교육 등 공공시설을 밀집시켰다. 중앙대로 중간에 거대한 기념물 없는 단순 교통광장(창 원광장)을 만들고 수직으로 관통하는 대로(원이대로)와 북쪽 극단에 경남도청을 두고 그 앞에서 수직 대로(창이대로)를 두었다. 초기 일괄적인 계획을 하고 그대로 실현했다. 이렇게 명확하게 효율적이며, 자동차 위주의 도시 구성은 르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를 그대로 붙여 넣기 한 것처럼 보인다. 

 

도로 중심의 완전한 격자 도시로 만들어진 시가지는 데카르트가 생각한 일관된 질서를 구현했다. 기능과 효율에 초점을 둔 도시로 가장 명확하게 용도지역의 구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팀10(TEAM X)의 근대 기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널리 알려진 시점에 창원에서 가장 철저한 기능주의 도시계획이 진행되었다. 당연히, 미학적 효과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 도시가 구상한 산업 시대가 이제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숙련공 불필요, 공간 재구조화 등)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산과 창원의 도시 형태는 진해와 비교된다. 마산은 계획과 난개발이 중첩된 혼성 도시로 한국현대사가 도시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창원은 단번에 만들어진 효율적인 도시로 1970~90년대의 고도성장에 적합한 기능형 도시다. 반면, 진해는 한반도에서 매우 드물게 미적 도시를 추구한 결과다. 물론, 진해가 원래 계획 과 달리 군항에서 요항으로 격하되고, 대공황과 중일전쟁을 거치며 개발이 멈춰 해군 배후도시에 머물렀다. 하지만 중심과 광장을 잇는 그 가로 구조는 우리나라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미학적 요소를 지닌 곳이다. 연재 1회에서 보았듯 중심 광장 가에는 당시 고전주의 미학을 담은 건축인 진해우체국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진해 같은 도시는 다시 지어지지 않았다. 효율적 도시구조와 예술적 효과의 결합이 그리 실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 내 많은 예각이 나타나면서 차량통행에 불편하며, 오거리와 육거리가 발생하는 등 비효율적이다. 그리고 특히 아름다운 질서는 신 혹은 왕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전지적 신의 관점에서 만든 도시 전체에 펼쳐진 기하 작도 형태는 하늘에서 보는 것이며 땅에 사는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 다. 북원광장의 동상은 멀리서 보이는 게 시각적으로 좋지만, 다가가기는 불편하다. 시각적 장치를 위해 둔 광장이 이제 차로 점령되었다. 자동차 시대에 대로와 연결된 광장은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아니라 차가 모이는 교통광장(특히 창원광장)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이유는 사실 부차적이다. 근본적 이유는 바로크식 방사형 구조와 그에 따른 미학 체계가 현대 개인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넷(R. Sennett)이 『공적 인간의 몰락』(1977)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공적 인간(Public man)이 사라진 사적 개인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크 가로는 광장 과 그에 접한 기념 건축(궁전, 성당, 대저택 등)에서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공적인 삶이 이뤄지는 장소다. 공적 영역은 에티켓이라 부르는 예절이 있었고, 복장과 대화술도 포함된다. 공공장소는 공동체의 집단 가치 를 공유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로크 도시 광장의 기념비와 주변 건축의 파사드가 공동의 가치를 드러냈다. 

 

 

방사형 도시계획이 많은 곳으로 확산되던 시점이던 18세기 말 19세기 초 르두(C.-N. Ledoux)를 필두로 한 “말하는 건축(Architecture Parlante)”이 나타났다. 건축 외부에 건축의 속성을 드러내는(말하는) 것이다. 당시 건축가들은 건물을 유형별로 구분하여 그 성격(Caractère)을 어떻게 드러낼지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성격을 드러내는 건축을 예술로 보고, 아닌 것은 예술로 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당시 근대 사법제도가 등장하면서 나타난 감옥은 처음에 엄정한 처벌의 성격을 파사드에 드러낸 건물이었으며, 도시 중심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가 감옥 파사드가 수행하던 '본보기' 교육의 역할을 학교가 맡는 시점에, 파사드의 무서운 모습은 불필요해진다. 심지어 감옥은 도시 중심에서 멀리 안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즉, 건축의 중심이 연 극성(theatricality)을 통해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에서, 개개인에게 규율을 통해 교육으로 전환하면서 내부 공간조직 (spatiality)이 점차 중요해진다. 19세기 중후반쯤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 했다. 

 

이 변화가 일상생활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우리 사회를 가만히 보면 이해된다. 우리는 사실 감옥 같은 집에 산다. 감옥은 위험한 죄수를 가두고 감시하지만, 우리는 무서운 바깥을 피해 집안에 스스로 유폐되어 안전하게 산다. 집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현관문이다. 그 현관문 옆에 달린 비디오폰은 외시경(peephole)에서 진화된 것으로, 그 장치는 감옥에서 죄수를 감시하던 장치와 같은 원리다. 나(간수 혹은 집 내부인)는 보이지 않으면서 남(죄수 혹은 외부인)을 볼 수 있다. 집 안, 즉 내부(interior)는 외부와 완전히 분리된 세상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기본적으로 현대 도시는 인간이 밀집된 장소에서 타인과 함께사는 공간이다. 전염병만큼 생존에 근원적 위험이자 공포는 모르는 타인이다. 범죄에 대한 공포 속에서 흔히 근대 추리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포의 「모르그 가의 살인」(1841)이 나왔다. 파리가 배경인 이 소설의 핵심은 누군지 모르는 타인이 나를 해칠 수 있다는 공포다. 그래서 일상생활은 거대한 도시 공간에 고립된 개인과 최소화된 가족이 안전하게 사는 집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대로에서 모르는 타인과 구경거리를 찾아 놀다가 안전한 집으로 들어가는 생활방 식이다. 개인과 가족이 중심이 되면서 공동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먼저다. 

 

우리는 전염병에서 벗어나고 타인에 대한 공포를 피하려 만든 추상적 계획도시 속에서 살 운명인 셈이다. 근대 공간에 살면서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매우 독특한 망탈리테(시대적으로 공유하는 심성)를 지닌다. 프라이버시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심리, 이제 모두가 받아들이는 가치로 자리 잡았다. 바깥의 도시는 나와 상관없다. 그래서 도시가 어떻게 꾸며졌는지보다 나한테 편리하고 안전한 집이 중심이 되었다. 이런 사회이다 보니 도시의 미적 가치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따라서 답은 19세기 도시문제를 풀려고 만든 공간이 낳은 우리의 생활 방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서구를 따라 근대화한 우리도 점점 더 사적 공간이 중요해졌다. 압축 근대화를 겪은 우리는 어쩌면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이 과정을 겪었다. 현재 우리는 이 현상을 아파트에서 일상적으로 겪고 있다. 관리와 통제를 위해 평평한 바닥판에 줄을 긋고 번호를 매긴 후 각각의 자리를 주고 칸막이 친 공간에 문을 달고 안에서 잠그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런 공간을 벗어나는 방식이 카페다. 이는 지난 연재에서 봤듯이 매우 한국적 현상이다. 

 

서구에서 개인주의의 대안으로 주목받은게 사람들이 집 밖에서 모이는 작은 광장이다. 지테(C. Sitte)는 오스만 파리와 유사하게 대로를 만든 도시(빈의 링슈트라세 등)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중세·르네상스의 옛 광장에서 원리를 찾아 『예술적 원칙에 따른 도시설계』(1889)를 썼다. 옛 광장은 도시의 거실이자 타인을 알아가는 공적 삶의 장소였다. 지테가 형태에서 발견한 것은, 옛 광장이 한 사람의 계획이 아닌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만들어져 기하작도와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건물로 에워싸여 있으며, 비스타 대신 감춰진 경관이 만들어지고 주요 기념물은 사람의 행동을 방해하지 않고 한쪽에 있다. 데카르트가 말한 한 사람의 계획과 반대다. 

 

 

유럽은 이런 근대 도시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찍 시작했다. 그래서 오스만의 파리나 지테가 지적한 빈은 상대적으로 외부공간 활동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는 그 결과를 볼 수 있다. 필자는 현재 연구년으로 파리에 머물고 있는데, 사람들의 집 밖 활동이 매우 많다. 센느강가에 퇴근 후에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정말 많고 다양한 축제를 개최하고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파리지앵은 오스만 시기에 지어진 집이 현재 기준으로 보면 불편하지만 감수하며 외부 활동을 더 많이 한다.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오스만 파리의 외부공간을 활용하면서 함께 사는 방법을 만들어 내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함께 사는 방법과 그 공간을 만드는 과정에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도시의, 전염병의 위협을 해결해 온 통제 가능한 구조를 포기할 수는 없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과거와 다른 현대 도시구조의 위력과 통제관리의 효율성을 다시 확인했다. 이 효율적 구조와 함께 타인과 함께 사는 방법을 찾는게 필요하다. 지테가 발견한 중세 광장 방식을 적용할 수 있고, 이를 더욱 세분화한 알렉산더(C. Alexander)의 253 패턴 중 일부를 선택할 수도 있다. 반에이크(A. van Eyck) 처럼 역사적으로 지속된 마을 구조에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 크리에 형제(Leon Krier, Rob Krier)가 제시한 다핵구조를 가지거나 제이콥스(J. Jacobs), 겔(J. Gehl)이나 Team X처럼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먼저 살펴볼 수도 있다. 최근 유행한 ‘15분 도시’도 같은 흐름에서 차량 대신 보행 중심 도시로 재편하자는 주장이다.

 

앞서 본 것처럼 우리 도시의 문제를 오래전부터 파악했고 다양한 대안이 제시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세종 특별자치시다. 실험적이자 획기적인 계획으로, 중심부를 녹지로 비워두고, 선형도시를 고리로 닫은 이중 환상형 도시다. 그 선형 교통망(특히 BRT)을 따라 20여 개로 나뉜 마을 단위를 만드는 것이다. 일상생활은 보행과 자전거를 구상하는 등 많은 기대를 했으나 결과는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중심을 비워서 녹지를 접하고 있지만, 분산된 시설들이 가져오는 비효율성이 나타났으며, 주변 도시 주민이 세종으로 옮겨 가면서 대전·공주 등 주변 도시가 쇠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세종시가 자족도시를 추구했으나 아직은 충족되지 못하고 일종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다.

 

도시는 결국 함께 시간을 두고 만드는 예술이다. 한 번에 완성되지 않으며, 항상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로우(C. Rowe)와 코에터(F. Koetter)가 『콜라주 시티』(1978)에서 지적한 것처럼 도시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다른 방식이 중첩되면서 계속 변화하는 산물이다. 유토피아적 이상 도시를 만들어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를 실현하려고 거주 이전과 개인의 욕망을 통제한다. 반대로 우리 도시는 개인의 욕망이 넘쳐나서, 공동 공간 만들기가 어렵다. 도시의 공공 공간을 만들려면 근대 사회의 이기적 개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돈이 되는 아파트 지상주의를 벗어나, 타인을 배려하는 도시 공간을 위한 양보가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 카페가 넘쳐난다는 것은 그만큼 도시 내 머물 공간이 없다는 의미다.

 

우리 도시는 기술 중심적이다. 기술 네트워크와 인간의 생활방식이 공존하면서 여러 겹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현재 한국 사회는 함께 살기에 대한 무관심 속에 기술에 기반한 효율성에 과도하게 경도된 사회다. 효율은 필요하지만 전부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도시를 우리가 살 공간으로 조직하는 예술이다. 살아갈 모습은 각 도시, 지역마다 역사가 다르듯 다른 모습을 가질 것이다. 개인이 점유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사는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도시라는 공동 예술이다. 도시는 서로 다른 것들이 함께 존재하는 복합체다. 

 

또한 우리 도시는 유연하지 않다. 마산과 창원에서는 있는 것을 고쳐 쓰지 않는다. 낡은 집은 재개발과 재건축으로 대규모 단지나 지역을 통째로 밀고 새로 짓는다. 단번에 만든 창원은 아파트 단지를 한꺼번에 재건축해야 하고, 마산은 난개발 지역을 인프라부터 새로 만들어야 한다. 파리 같은 더 오래된 근대 역사도 시들은 도시를 유지하고 있다. 시민들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도시와 건축에 관심이 많으며 그리고 함께 도시해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관점으로 진해를 보면 흥미롭다. 진해는 해방 이후 80년이 넘는 동안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 이면에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적합한 생활 조직이 정착되었다. 오래된 건물과 새 건물이 공존하면서 필요에 따라 변경되었다. 물론, 진해도 경제구조의 변화(부산진해신항과 가덕도신 공항) 속 해군과 벚꽃 의존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근대도시모델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첫째, 전세계가 겪고 있는 도시집중현상으로 나타난 글로벌시티 (Global City)인 서울과 수도권으로 집중되면서, 지방도시는 새로운 비어가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수도권 쏠림은 지역 안에서 다시 거점 도시로의 쏠림을 낳고, 자본주의의 고도화는 이렇게 연쇄적인 공간 변화로 드러난다. 이는 통제 도시 모델과 그 부산물인 개인주의·효율성을 넘어서려는 그동안의 노력을 무색 하게 만드는 변화다.

 

또 다른 시험대는 요즘 한참 화제인 AI에 기반한 스마트시티다. 목전에 다가온 스마트시티는 여전히 산업이 초점이다. 즉, 스마트 산단이 도시 만들기에 앞선다. 근대 기술이 주도한 근대화가 인간 소외를 낳았듯이, AI기술이 주도하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인간은 끌려가고 있다. 만능처럼 보이는 AI가 좋은 도시를 자동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기술은 효율적인 시스템과 물리적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공감대를 가지고 개인과 공동의 생활방식을 판단해야 한다.

 

Art(예술)이 라틴어ars에서 왔고, Ars는 그리스어 τέχνη/tékhnē(테크네)의 번역어다. 테크네는 현재의 기술과 예술을 포함하는 넓고 포괄적인 “술(術)”을 의미한다. 스토아학파는 특히 삶의 테크네(technē tou biou)를 강조했는데, 이는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의무와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멀리 갈 것 도 없이, 근대 과학이 우세해지기 전에는 타인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 어느 사회에나 있었다. 우리가 도시에서 만들려는 것은 타인과 함께 머무는 공간을 조직하는 것으로, 이는 사실 타인과 함께 사는 방식, 즉 예술을 조직한다는 의미다. 근대에 들어와 무질서를 질서로 바꾸는 작업은 도시를 한눈에 파악되는 공간으로 재편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나와 남의 관계를 조직하는 삶의 기술(art of living, art de vivre)을 내려놓고 근대 공학 기술에 모든 것을 맡겼다. 이제 다시 목전에 온 새로운 기술이 도시의 근본을 바꿀 때, 하나의 질서에 의존하는 게 아닌, 다양한 질서들의 결합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도시는 복잡계이고 우리는 함께 도시를 만들어가는 예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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