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ENE

10월호

RSS

[새로운 시선] 지금 미술의 장면들

선은 조각이 되고, 색은 기록이 된다

- 윤정민·조유정 작가로 읽는  동시대 미술의 감각 -

 

 

현대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이 더 이상 ‘무엇을 그렸는가’만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작가들은 눈앞의 대상을 재현하는 데서 나아가, 재료가 가진 성질과 제작 과정, 작품이 놓이는 공간, 그리고 그안에 담긴 질문까지 작업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동시대 미술을 볼 때는 완성된 이미지뿐 아니라, 그 작품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 졌는지, 어떤 방식으로 쌓이고 배열되었는지, 작가가 왜 그 형식에 도달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OCI미술관의 OCI YOUNG CREATIVES는 만 35세 이하의 젊은 한국 작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매년 공개 공모와 심사를 통해 작가를 선정하고, 창작지원금과 개인전 기회를 제공한다. 2026년에는 서도이, 윤정민, 이규상, 이은경, 장승근, 조유정 작가가 선정되어 개인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 윤정민과 조유정, 두 작가를 통해 지금 한국 동시대 미술의 한 장면을 살펴본다. 윤정민은 드로잉의 선을 철과 한지, 인청동의 조각으로 옮긴다. 조유정은 색을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 기록하고 보존해야 할 감각의 체계로 다룬다. 한 작가는 선을 조각으로 만들고, 다른 한 작가는 색을 아카이브로 만든다.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루지만, 두 작가 모두 재료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감각을 조직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윤정민, 드로잉이 조각이 되는 자리

윤정민 작가는 조각을 만든다. 그러나 그의 조각은 처음부터 무겁고 단단한 덩어리로 출발하지 않는다. 출발점은 드로잉이다. 종이 위에 빠르게 그어진 선, 해부학적 정확성보다 몸이 느끼는 리듬을 따르는 형상, 즉흥적으로 생겨난 감각이 철과 한지, 인청동을 만나 조각이 된다.

OCI미술관 개인전《꼴》은 2026년 8월 20일부터 10월 8일까지 열리는 전시로, 철과 한지, 인청동을 결합한〈나무와 뿌리〉를 중심으로 작가의 조각 세계를 보여준다. 작가는 철판을 자르고, 불에 달구고, 두드려 형태를 만든다. 주조가 아니라 직접 철을 다루는 단조 방식은 손의 흔적과 노동의 시간을 작품 안에 남긴다. 철은 단단하지만 불 속에서 달아오르면 휘어지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빠르게 식는다. 작가는 짧은 시간 안에 형태를 붙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조각은 계획된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몸의 속도와 판단이 새겨진 물체가 된다. 윤정민 작가의 조각에는 한지도 자주 등장한다. 철이 단단하고 차가운 재료라면한지는 섬유질의 결을 가진 부드럽고 연약한 재료다. 서로 다른 물성은 한 조각 안에서 충돌하고 결합한다. 철의 검고 거친 표면, 한지의 밝고 섬세한 결, 인청동의 이질적인 연결감은 작품을 단순한 형상 이상의 존재로 만든다. 그의 조각은 완전히 사람 같지도, 사물 같지도 않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원이나 의례의 분위기를 품고 있다.
전시 제목인《꼴》도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꼴’은 누군가의 생김새나 처지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물의 모양과 형상을 뜻하기도 한다. 윤정민 작가는 이 단어 안에서 삶의 모양, 가족의 관계, 운명처럼 주어진 조건들을 조각으로 다시 세운다. 특히 사주와 오행, 장승과 당산나무 같은 민속적 이미지가 작업 안으로 들어온다. 

〈나무와 뿌리〉는 그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위로 자란다. 동시에 가족의 계보, 삶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 무엇인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불〉은 장승과 솟대의 이미지를 참조하며, 액운을 막고 풍요를 기원하던 민속적 조형의 감각을 오늘의 조각 언어로 바꿔낸다.〈상相〉연작은 정형화되지 않은 얼굴과 몸을 통해 잡귀나 정령 같은 애니미즘적 존재를 떠올리게 한다.
윤정민 작가의 조각을 볼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닮았는가’를 맞히는 일이 아니다. 철의 표면이 어떻게 휘어졌는지, 한지가 어떻게 붙어 있는지, 부식과 얼룩이 어떤 표정을 만드는지 살펴보는 것이 먼저다. 그의 작업에서 조각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삶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재료를 통해 드러난 형식이 된다.

 

 

조유정, 색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회화

조유정 작가는 색을 그린다. 하지만 여기서 색은 단순히 화면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가 아니다. 색은 연구의 대상이고, 수집의 대상이며, 회화가 성립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조유정은 안료가 가진 물질성, 색이 탄생한 역사, 색이 보존되고 분류되어 온 방식을 함께 탐구한다.

OCI미술관 개인전 《영원한 경이》는 2026년 4월 17일부터 5월 30일까지 열린 전시다. 조유정 작가는 해당 전시에서 색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을 탐구하며, 안료가 품어온 시간이 격자의 구조 속에 질서 있게 배열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수납장 속에 오래된 그림, 직접 키운 장미, 원물질 그대로의 광석이 나란히 놓이고, 색이 지닌 역사와 가치가 위계 없이 공존한다고 말한다. 

조유정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어는 투명함, 돌이킬 수 없음, 영원함, 그리고 진실하고 진짜인 감각, 즉 Genuine이다. 수채는 투명하다. 물과 함께 번지고 스며들며, 종이 위에 얇은 결을 남긴다. 그러나 그 투명함은 가볍지 않다. 한 번 종이에 스민 색은 쉽게 닦아내거나 되돌릴 수 없다. 바로 그 돌이킬 수 없음 때문에 조유정의 화면은 더욱 신중하고, 동시에 더욱 진실하게 느껴진다.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형식은 격자와 수납장이다. 격자는 색을 나누고 비교하게 만드는 구조다. 하나의 색처럼 보이는 분홍, 초록, 보라 안에도 수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수납장은 색과 이미지를 보관하는 장치처럼 작동한다. 작품 속 장미, 조각상, 광석, 조개, 고전 이미지와 장식적 패턴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색이 지나온 시간과 감각을 담는 작은 표본처럼 자리한다.

〈분홍 수납장〉은 이러한 작업 방식을 잘 보여준다. 화면에는 장미와 조각상, 장식장, 작은 인물과 사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분홍은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색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날씨와 빛, 꽃잎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분홍의 값이 화면 안에서 펼쳐진다. 〈초록 수납장〉에서는 초록이 자연의 색이면서 동시에 광석, 식물, 괴물, 곤충, 장식적 이미지와 결합해 기이하고 환상적인 감각으로 확장된다.
〈1638 Purple & Violet〉은 보라와 자주의 세계를 보여준다. 조개와 인물, 장식적 이미지가 겹겹이 쌓이며 보라 색이 가진 신비, 권위, 장식성, 역사성을 한 화면 안에 끌어들인다. 조유정 작가의 회화는 멀리서 보면 화려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색의 층과 작은 도상, 촘촘한 격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작품은 한 번에 읽히지 않는다. 색은 눈에 보이는 동시에, 시간과 물질의 기록으로 남는다.

조유정 작가는 회화를 색의 목록을 완성하려는 시도라기보다, 색이 축적되고 분류되어 온 시간을 한 화면 안에 병치하는 아카이브적 장치로 설명한다. 즉 그의 회화는 하나의 보관함이자 세계 모델이며, 그 안에는 서로 다른 시대와 가치가 겹쳐 존재한다. 

조유정 작가의 그림 앞에서는 색을 빨리 해석하려 하기보다 오래 바라보는 것이 좋다. 하나의 분홍이 얼마나 많은 분홍으로 나뉘는지, 초록이 얼마나 다양한 분위기로 변하는지, 투명한 수채가 어떻게 겹쳐지고 남는지 살펴보는 일. 그렇게 볼 때 색은 단순한 표면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 물질과 감각이 축적된 기록이 된다.

 

 

두 작가를 통해 보는 지금의 미술

  윤정민 작가와 조유정 작가는 서로 다른 매체를 다룬다. 윤정민은 철과 한지, 인청동을 통해 조각을 만들고, 조유정은 수채와 안료, 종이를 통해 회화를 만든다. 한 사람은 드로잉의 선을 공간 속 조각으로 옮기고, 다른 한 사람은 색의 체계를 화면 속 아카이브로 만든다. 그러나 두 작가의 작업은 중요한 지점에서 만난다. 이들에게 재료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질문의 방식이다.
윤정민 작가에게 철은 운명과 가족, 기원과 보호의 감각을 담는 재료가 된다. 조유정에게 색은 아름다운 표면을 넘어 역사와 체계, 보존과 감각의 문제를 품은 재료가 된다. 두 작가 모두 작품을 통해 “무엇을 표현했는가”보다 “어떤 재료와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하게 하는가”를 묻는다.
  현대미술을 볼 때 모든 의미를 곧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먼저 재료를 보면 된다. 철의 거친 표면, 한지의 결, 수채의 투명함, 안료의 층, 격자의 구조, 수납장의 배열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작품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조각은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삶의 형식이 되고, 회화는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색의 기록이 된다.

 

#미술

SCENE 전체글